이런저런이야기

편의를 위해 함흥 성곽이 훼손되는 것은 불가피하니, 함흥 재류 일본인단체

조현정팀장 2017. 1. 22. 18:32

훼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85) 일본병참사령부는 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도로 개축을 위해 평양성 부근 민가 58호도 없애려고 하였다. 86)
이후 사령부에서 대동문 서쪽부터 남문 성벽까지 허문 후에 도로를 만들었다고 평양 군수가 보고한 내용으로 보아, 대동문 성벽은 10월 초순에 훼철된 것으로 파악된 다. 87) 이어서 일본군은 대동문 밖 옹성을 파괴했다. 88) 이 때 대동문 성벽 쪽이 최초로 허물어 진 것은 일본인 시가지와 연결된 부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7년 5
월 평양이사청은 주작문의 좌우 성벽도 훼철하였다. 89)
함흥성의 성곽 훼철은 1906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결정되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는 일본군이 성벽을 훼철하고 도로를 개설하려는 것에 대해 국경의 방어를 이유로 제지하였다. 90) 그러나 얼마 뒤인 4월 30일에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교통의 편의를 위해 함흥 성곽이 훼손되는 것은 불가피하니, 함흥 재류 일본인단체 및 원산 이사관이 청원하면 허가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낸다. 그 사이 통감부에서 주재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경의 방어를 할 것이므로 문제없다는 내용을 정부에게 전달한 것이다. 통감부는 함흥성을 헌 후에 재류일본인들이 도로와 하수 구의 설치를 담당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도시가 발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91) 이후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함경남도관찰사에게 일본인이 함흥 성벽을 훼철한 뒤 도로를 개설하는 것을 허가하라고 지시하였다. 92) 이어 일본 헌병은 구천각(九千閣)도 훼철 하였다. 93)
또한 일본 병참소는 1905년 10월 평안남도 안주에서 평안문과 소동문을 임의로 허물었고 94) , 1907년 7월에는 강계군 주재 일본 수비대가 강계읍성의 성벽을 훼철하였 다. 95) 이들 지역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북쪽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다소 이른 시기인 1905년부터 1907년 사이에 훼철이 진행되었다. 96)
85)平壤報牒제2책, 奎17872­2(평양감리서리 평양감리서주사 김훈→외부대신 박제순); 毁城 作路 ,帝國新聞, 1905년 10월 3일.
86)平安南北道來去案제10책, 奎17988(평안남도관찰사서리 평양 군수 이승재→외부대신 박제 순).
87) 民難奠接 ,皇城新聞, 1905년 10월 11일.
88) 民情不忍 ,帝國新聞, 1905년 11월 14일.
89) 平察質稟 ,帝國新聞, 1907년 5월 4일.
90) 毀城不許 ,皇城新聞, 1906년 4월 20일.
91)內部來去案제1책, 奎17768(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이지용); 城壁毀撤 ,大 韓每日申報, 1906년 5월 8일.
92)內部來去案제1책, 奎17768(내부대신 이지용→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不得不認 ,大 韓每日申報, 1906년 6월 14일; 毁城又認 ,帝國新聞, 1906년 6월 14일.
93) 亦一恠事 ,皇城新聞, 1906년 6월 28일.
94) 安州郡報 ,帝國新聞, 1905년 10월 30일.
95) 城堞毁撤의辨明 ,帝國新聞, 1907년 6월 22일; 虛實相蒙 ,皇城新聞, 1907년 6월 22일.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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