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서문 까지 이루어진 도로공사에 따라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읍성의 서쪽 성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후 전주 시가지

조현정팀장 2017. 1. 27. 00:00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全群道路)의 개수공사를 시작했다. 전주 근교에서 서문 까지 이루어진 도로공사에 따라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읍성의 서쪽 성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후 전주 시가지 서쪽에 반원형의 도로가 개설되었다. 142) 이어서 전주 남문의 좌우 성벽은 통행의 불편을 이유로 훼철되었고, 이후 도로가 개설되었다. 143)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북부 지방의 성곽이 훼철되기 시작했 다. 이후 대구에서는 거류민단이 성곽 훼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서울에서는 통감부 설치 이후 성벽 훼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다가,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의 구성으로 도성의 일부분이 처음으로 허물어졌다. 이후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각 지역의 성곽 훼철이 결정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인 지방관리의 요청에 의해 성곽의 훼철이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새로운 도로의 개설을 위해서 성곽의 외벽인 성벽이 주로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찰부 소재지 13곳 가운데 서울, 충주, 전주, 광주, 대구, 진주, 평양, 함흥 총 8곳의 성곽이 훼철되었다. 성곽의 훼철은 일본인 거류민이 진출해 있는 도시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 시기 성벽이 훼철된 지역 가운데 일본인 거류민이 적은 곳은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훼철된 동림진과 남원 두 곳이 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 거류민이 조선시대부터 활성화된 전통적인 성곽도시가 형성된 곳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기존 도시의 장벽을 허문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는 1912년 10월 7일 시구개정의 지침을 시달했다. 이후 각 도시의 시가도로가 개수되면서 읍성의 훼철이 계속되었다. 시구개정으로 인한 시가지 개조는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 이 공포될 때까지 22년간 지속 되었다. 한국병합 후 총독부가 시가지를 개조하며 훼철한 성곽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서울에서는 광희문 부근 성벽(1912), 남소문터 부근 성벽(1913), 남대문­소 의문 구간 성벽, 소의문(1914), 돈의문(1915)이 훼철되었다. 144) 또한 전주읍성의 동반부 (1910) 145) , 청주읍성(1911∼1912) 146) , 경주읍성의 남문(1912) 147) , 광양읍성의 일부분 (1913) 148) 등이 훼철되었다. 이후 평양성의 서쪽 성벽(1914∼1916) 149) , 나주읍성(1910
∼1920) 150) , 길주읍성의 동문(1918)이 허물어졌다. 제주도에서는 1910년대에 읍성의 대
142) 全州府, 1943,全州府史, 666쪽; 福島士郞, 1909,李朝と全州, 113∼115쪽.
143) 全州開路 ,皇城新聞, 1909년 9월 12일.
144) 서울역사박물관, 2015,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54∼57쪽.
145) 朝鮮總督府, 1930,朝鮮土木事業誌, 1050쪽;全州府史, 691쪽.
146) 박상일, 2013, 청주읍성의 파훼와 성돌의 분산 ,충북문화재연구제8호, 50쪽.
147) 김신재, 2009, 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 ,신라문화제33집, 93쪽.
148) 우승완·남호현, 앞의 논문, 226∼227쪽.
149) 김민아·정인하, 앞의 논문, 221쪽.
150) 전근완, 앞의 논문,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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