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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이후 남산과 남대문 일대는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해갔다

조현정팀장 2017. 1. 28. 01:30

1) 서울
청일전쟁 이후 남산과 남대문 일대는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해갔다. 1910년 한국 병합 후 일본인 거류민의 수도 1905년 7,677명에서 34,468명으로 4배 이상 증가하였 다. 거류민은 주요 거주지역인 남산 밑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신용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다수 몰려들었고, 이에 따라 남대문 안쪽과 용산 쪽을 연결하는 도로의 개수가 시급하게 되었다. 161) 1907년 처음으로 도성의 성벽이 훼철된후 남대문의 남·북쪽을 기점으로 도로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인 거주지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남대문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 도로의 개수가 이어졌다. 시구개정이 시행되기 전인 1910년까지 이루어진 도로공사를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3] 성벽 훼철 후 서울 시가 도로 공사 (1907∼1910년)
공사 기간 공사 구간 延長 路幅 공사비용
1907년 9월 15일∼ 1908년 10월 30일
남대문 도로 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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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8칸씩 (약 14.5m) 137,776원 88전
∼1909년 5월 30일
남대문 도로 개착 부속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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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 남대문 정차장 도로 개수
240칸 (약 436.3m)
19칸 (약 34.5m) (보도 양측 2.75칸, 차도 13.5칸)
銅峴 도로 개수
464칸 (약 843.6m)
∼1910년
12칸 (약 21.8m) (보도 양측 1.5칸씩, 차도 ­ 9칸)
壽町­日出町
180칸 (약 327.2m)
5칸 (약 9.1m)
광희문­왕십리 도로 개수
454,604원 (부분개수 공사 포함)
도로 개수
593칸 (약 1078.1m)
유효폭원 4칸 (약 7.3m)
동대문 도로 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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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박찬승, 2002, 러일전쟁 이후 서울의 일본인 거류지 확장 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제 5권 제2호, 131쪽.
- 29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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