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3월 거류민단은 5천원을 투자하여 폭 약 12.7m 의 도로공사에 착수하려고 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도로위원회’를 조직하고 4대문에 각 3명씩 12명의 위원을 위촉하였다. 172) 3일 뒤인 11 월 18일 개최된 제1회 위원회에서 북문·동문 밖의 도로 개통 173) 이 승인되었고, 대구 역전 도로의 폭은 약 10.9m로 결정되었다. 174) 일본인 거류민단이 도시 계획의 세부적인 요소인 도로를 개설할 지역과 노폭까지 결정한 것이다.
1907년 3월 거류민단은 5천원을 투자하여 폭 약 12.7m 의 도로공사에 착수하려고 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75) 같은 해 4월 대구성벽이 거의 훼철된 후, 1908년에서 1911년까지 진행된 공사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5] 성곽 훼철 후 대구 시가 도로 공사 (1908∼1912년)
공사 기간 공사 구간 연장 노폭 공사비용
1908년 12월 ∼ 1909년 12월
4성로
24町 (약 2617.9m)
3칸 (약 5.5m)
19,949원
1909년 12월 ∼ 한국병합 직전
십자대로 공사
실용폭 5.61칸 (약 10.2m)
38,962원 64전 8리
달서교동문
1910년 5월 25일 ∼ 1912년 5월
도로개수
557.47칸 (약 1013.5m)
실용폭 5.61칸
(약 10.2m) 38,962원
64전 8리 북문남문
도로개수
427.9칸 (약 777.9m)
실용폭 5.61칸 (약 10.2m)
1912년 성벽도로 노면
750칸 (약 1363.5m)
7칸 (약 12.7m)
1,168원 29전 2리 (십자로 준공잔금)
172) 동문 小倉武之助, 吉田壽一郞, 大久保太三郞 북문 町田久吾, 吉田佑七, 神守源三郞 서문 岩瀨稱, 戶倉十六, 中江五郞平 남문 增田虎太, 河井朝雄, 妹尾久太郞 173) 이주 초반에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지가가 싼 성의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성곽 훼철은 북문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이러한 점이 도로 노선이 북문과 동문 쪽으로 결정된 것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174)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6쪽;大邱物語, 163∼164쪽.
175) 이에 앞서 1907년 2월 부산거류 일본인 부호 大池忠助가 대구성지 개수청원서라는 것을 대구이사청에 제출하였다. 성벽이 헐리고 난 뒷 터에 자비로 5칸(약 9.1m) 도로를 개설하고그 대신 나머지 2칸(약 3.6m) 폭을 99개년간 무상 貸下해주면 이를 일본거류민들에게 매 평당 40전씩 받고 임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구 거류민은 개인이 이익을 독점하려는 것이라고 이에 반대하고, 도로개설을 거류민단사업으로 하여 5천원의 사업비를 부담할 것을 제의하나 한국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5쪽).
- 35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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