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이야기

1907년 3월 거류민단은 5천원을 투자하여 폭 약 12.7m 의 도로공사에 착수하려고 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조현정팀장 2017. 1. 31. 02:30

도로위원회’를 조직하고 4대문에 각 3명씩 12명의 위원을 위촉하였다. 172) 3일 뒤인 11 월 18일 개최된 제1회 위원회에서 북문·동문 밖의 도로 개통 173) 이 승인되었고, 대구 역전 도로의 폭은 약 10.9m로 결정되었다. 174) 일본인 거류민단이 도시 계획의 세부적인 요소인 도로를 개설할 지역과 노폭까지 결정한 것이다.
1907년 3월 거류민단은 5천원을 투자하여 폭 약 12.7m 의 도로공사에 착수하려고 했으나, 한국정부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75) 같은 해 4월 대구성벽이 거의 훼철된 후, 1908년에서 1911년까지 진행된 공사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5] 성곽 훼철 후 대구 시가 도로 공사 (1908∼1912년)
공사 기간 공사 구간 연장 노폭 공사비용
1908년 12월 ∼ 1909년 12월
4성로
24町 (약 2617.9m)
3칸 (약 5.5m)
19,949원
1909년 12월 ∼ 한국병합 직전
십자대로 공사 ­
실용폭 5.61칸 (약 10.2m)
38,962원 64전 8리
달서교­동문
1910년 5월 25일 ∼ 1912년 5월
도로개수
557.47칸 (약 1013.5m)
실용폭 5.61칸
(약 10.2m) 38,962원
64전 8리 북문­남문
도로개수
427.9칸 (약 777.9m)
실용폭 5.61칸 (약 10.2m)
1912년 성벽도로 노면
750칸 (약 1363.5m)
7칸 (약 12.7m)
1,168원 29전 2리 (십자로 준공잔금)
172) 동문 ­ 小倉武之助, 吉田壽一郞, 大久保太三郞 북문 ­ 町田久吾, 吉田佑七, 神守源三郞 서문 ­ 岩瀨稱, 戶倉十六, 中江五郞平 남문 ­ 增田虎太, 河井朝雄, 妹尾久太郞 173) 이주 초반에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지가가 싼 성의 동쪽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성곽 훼철은 북문 근처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주도한 것으로 이러한 점이 도로 노선이 북문과 동문 쪽으로 결정된 것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174)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6쪽;大邱物語, 163∼164쪽.
175) 이에 앞서 1907년 2월 부산거류 일본인 부호 大池忠助가 대구성지 개수청원서라는 것을 대구이사청에 제출하였다. 성벽이 헐리고 난 뒷 터에 자비로 5칸(약 9.1m) 도로를 개설하고그 대신 나머지 2칸(약 3.6m) 폭을 99개년간 무상 貸下해주면 이를 일본거류민들에게 매 평당 40전씩 받고 임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구 거류민은 개인이 이익을 독점하려는 것이라고 이에 반대하고, 도로개설을 거류민단사업으로 하여 5천원의 사업비를 부담할 것을 제의하나 한국정부에서 허락하지 않았다(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5쪽).
- 35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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