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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팀장
삶이 지칠때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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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3. 00:30 이런저런이야기

제3절 통감부 : 서울의 사례
종로­남대문­원효로 4가의 전차궤도부설공사가 1900년 1월에 완공되어 남대문의 좁은 누문 안으로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1905년 초부터는 경부철도까지 개통되어 많은 철도 승객이 남대문을 통해서 입성하였으므로 남대문 관문은 매우 혼잡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헐고 성문을 우회하는 2개의 통로와 하나의 대로를 뚫어 통행을 편리하게 하자는 공문을 1905년 6월 27일에 보내 왔으나 116) , 한국정부는 거절하였다. 117)
그러나 1905년 11월에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정 간섭이 심해졌다. 결국 1907년 3월 30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동대문·남대문 좌우성첩을 훼철하는 건 을 올려 고종에게 재가를 받았다. 마차와 사람이 동대문과 남대문의 중간을 관통하는 전차에 치이는 사고가 많으므로, 문루 좌우의 성벽을 각 8칸씩 훼철하여 전차의 출입선로로 삼게 하고 정문으로는 사람만 통행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118)
내부에서는 훼철할 남대문 좌우 성벽 8칸 부근의 가옥 가운데 외국인 가옥은 해당 이사청과 교섭해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본국인 가옥은 시세에 따라 매수하라고
인 상권 지역이 대구의 중심상권으로 자리 잡았다).
116)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에 의해서 한국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회는 서울의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교통상 장애가 되는 남대문의 처리였다. 당시의 조선군사 령관 長谷川好道는 砲車의 왕래에도 지장이 생기니,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리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인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中井喜太郎(中井錦
城와 동일인물)가 남대문 파괴에 반대하고 보존을 주장했다. 남대문은 加藤淸正가 임진왜란
때 빠져나간 문으로,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남대문 좌우 도로 확장안을 제시 하여 도면을 첨부해서 하야시공사에게 올렸다. 그 결과 서울 성안­남대문­남대문 정차장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남대문 좌우 도로를 확장한 형태로 이루어졌다(中井錦城, 1915,朝鮮回顧
錄, 糖業硏究會出版部, 167∼169쪽; 長野末喜, 1932,京城の面影, 內外事情社, 212쪽; 岡田
貢, 1936,京城史話, 日韓書房, 69∼70쪽; 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16∼217쪽에서 재인용). 오타는 이것이 결정된 때를 하세가와가 조선군사령관이었던 1904년 9월∼1908년 11 월과 나카이가 경성거류민단회장이었던 1903년 10월∼1905년 12월까지가 겹치는 1904년 9월 부터 1905년 12월 사이로 보고 있다. 일본공사 하야시가 갑자기 1905년 6월에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훼철하자고 건의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117) 손정목, 1982, 앞의 책, 110∼111쪽.
118)官報, 1907년 4월 3일;議政府 起案제23책, 奎17746(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 決議上奏 ,皇城新聞, 1907년 4월 1일; 電路特開 ,皇城新 聞, 1907년 4월 3일.
1907년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의 성벽을 훼철하고 전차선로를 가설키로 결정되었다. 전차로를 복선화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단선일 경우는 성문 중앙으로 궤도가 설치되었지만 복선일 경우 성곽을 훼철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04,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 293쪽).
- 22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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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