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벽 훼철 이후의 상황
제1절 신작로 건설 : 서울, 평양, 대구, 전주의 사례
통감부가 설치된 후 이토통감은 시정개혁의 일환으로 도로개설을 시작했다. 157) 통감 부는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일부를 나눠서 주요 도로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진남 포-평양-원산 간, 광주-목포 간, 대구-경주-영일만 간, 전주-군산 간의 4개선의 개설을 위하여 149만 6,000원의 보조금을 책정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설계에 착수하여 1907년 5월 4개선을 동시에 기공하여 같은 해 말까지 공사를 마쳤다. 158) 이와 같은 신작로 159) 의 개설은 한국병합 후에도 계속되었다.
본장에서는 성벽이 훼철된 후 생긴 도로망의 변화나 도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시구개정사업이 일어나기 전인 1912년까지 도로가 공사된 상황을 살펴보 겠다. 160)
157) 1906년 4월 20일 국장 1인, 사무관 2인, 기사 2인의 치도국을 내부에 임시로 설치하고, 평양·대구·목포·군산 등에 치도공사소를 두어 도로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1906년 6월 치도국을 토목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08년에는 토목과·조사과·서무과·위생공사과의 4과를 설치하는 등 도로 건설을 위한 조직의 개편도 이루어졌다(조병로, 2009, 일제 식민지시기의 도로교통에 대한 연구(Ⅰ)-제1기 治道事業(1905∼1917)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 연구제59호, 11쪽).
158) [주석 표 4] 1906년 시행 도로공사 현황
구간 거리 준공거리 대구영일만 93,277m 16,754m 군산전주 68,299m 19,774m 진남포평양 53,000m 6,000m 목포광주 86,920m 20,800m
출처 : 京城府, 1934,京城府史(3), 朝鮮印刷株式會社, 299∼300쪽.
159) 신작로라는 용어는 서울시내의 전차가 다니는 도로 신설이라는 의미로 1901년 1월 9일자 제국신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 이후 신설도로, 혹은 기존도로와 같은 노선이더라도 근대적 차량의 통과를 전제로 한 고규격 도로를 가리키는 말로서 민간 인쇄물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도도로키는 그의 논문에서 신작로를 일제가 건설한 ‘高規格 도로’라고 정의하였다(도 도로키 히로시(轟博志), 2004, 20世紀前半 韓半島 道路交通體系 變化 “新作路” 建設過程을 中心으로 ,지리학논총별호54, 4∼5쪽).
160) 총독부는 1912년 10월 7일 훈령 9호를 통해 시가지를 상대로 하는 시구개정에 대해 시달 했다. 그 후 1913년 2월 25일자 총독부령 제11호로 市街地建築取締規則 을 경찰법령의 하나로 발포하게 된다. 1913년부터 시구개정사업을 실시한 도시는 서울, 대구, 부산, 평양, 진남포, 신의주, 전주, 진해, 진주, 해주, 겸이포, 함흥이었다.
- 28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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