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24. 19:35
이런저런이야기
통감부가 도성의 성벽을 허문 것은 교통 혼잡을 해결하고 근대적인 도로를 개설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지만, 동시에 성곽 파괴를 통해 왕성의 권위를 박탈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메이지정부가 막부의 상징이었던 성곽을 파괴하며 구 권력이 새로운 정부체제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도성을 파괴함으로써 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129)
[그림 1] 좌우 성벽 훼철 전의 남대문(1895년 촬영) [그림 2] 좌우 성벽 훼철 후의 남대문(1910년 촬영) 출처 :京城府史출처 :京城府史
[그림 1]에서 남대문 양쪽에 성벽과 민가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대문의 좌우 성벽이 훼철된 [그림 2]를 보면 민가들이 정리된 것과 전차가 더 이상 남대문의 홍예 안을 통과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2월 18일에 열린 제31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법부대신 조중응이 하수개수를 위해서 청계천 하구인 동대문 부근의 성벽을 파괴할 것을 제의했 다. 130) 남대문의 남측 성벽은 3월 8일부터 훼철이 시작되었고, 131) 동대문의 북측 성벽과 남측 오간수문은 3월 11일부터 훼철되었다. 132) 이어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9월에
128)京城の面影, 212쪽.
129) 메이지정부는 막부의 성을 파괴하며 옛 권위가 새로운 정부체제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舊 藩領民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戊辰전쟁때 정부와 교전한 東北·北陸의 여러 藩이나 親幕府쪽
의 大名가 거주하는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후에 江戸城 외곽의 성벽과 성문의 보존이 주장되었지만 그 이유는 宮城의 존엄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보아 서울의 성곽의 파괴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6∼207쪽).
130) 김정명, 1967,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31회 ,일한외교자료집성6中, 巖南堂書店, 539쪽(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5쪽에서 재인용).
131)京城府史(2), 292쪽; 毀城着手 ,皇城新聞, 1908년 3월 10일.
132) 先着東門 ,皇城新聞, 1908년 3월 8일; 毁城着手 ,大韓每日申報, 1908년 3월 12일( 경성부사(2)292쪽에서는 동대문 좌우성벽의 훼철이 3월 8일부터 이루어졌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1934년 간행된경성부사보다는 훼철 당시에 기사가 나온 두 신문에 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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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좌우 성벽 훼철 전의 남대문(1895년 촬영) [그림 2] 좌우 성벽 훼철 후의 남대문(1910년 촬영) 출처 :京城府史출처 :京城府史
[그림 1]에서 남대문 양쪽에 성벽과 민가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대문의 좌우 성벽이 훼철된 [그림 2]를 보면 민가들이 정리된 것과 전차가 더 이상 남대문의 홍예 안을 통과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2월 18일에 열린 제31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법부대신 조중응이 하수개수를 위해서 청계천 하구인 동대문 부근의 성벽을 파괴할 것을 제의했 다. 130) 남대문의 남측 성벽은 3월 8일부터 훼철이 시작되었고, 131) 동대문의 북측 성벽과 남측 오간수문은 3월 11일부터 훼철되었다. 132) 이어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9월에
128)京城の面影, 212쪽.
129) 메이지정부는 막부의 성을 파괴하며 옛 권위가 새로운 정부체제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舊 藩領民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戊辰전쟁때 정부와 교전한 東北·北陸의 여러 藩이나 親幕府쪽
의 大名가 거주하는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후에 江戸城 외곽의 성벽과 성문의 보존이 주장되었지만 그 이유는 宮城의 존엄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보아 서울의 성곽의 파괴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6∼207쪽).
130) 김정명, 1967,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31회 ,일한외교자료집성6中, 巖南堂書店, 539쪽(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5쪽에서 재인용).
131)京城府史(2), 292쪽; 毀城着手 ,皇城新聞, 1908년 3월 10일.
132) 先着東門 ,皇城新聞, 1908년 3월 8일; 毁城着手 ,大韓每日申報, 1908년 3월 12일( 경성부사(2)292쪽에서는 동대문 좌우성벽의 훼철이 3월 8일부터 이루어졌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1934년 간행된경성부사보다는 훼철 당시에 기사가 나온 두 신문에 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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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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