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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지칠때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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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8. 01:30 이런저런이야기

1) 서울
청일전쟁 이후 남산과 남대문 일대는 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변해갔다. 1910년 한국 병합 후 일본인 거류민의 수도 1905년 7,677명에서 34,468명으로 4배 이상 증가하였 다. 거류민은 주요 거주지역인 남산 밑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특히 신용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다수 몰려들었고, 이에 따라 남대문 안쪽과 용산 쪽을 연결하는 도로의 개수가 시급하게 되었다. 161) 1907년 처음으로 도성의 성벽이 훼철된후 남대문의 남·북쪽을 기점으로 도로공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인 거주지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남대문에서 남대문정거장까지 도로의 개수가 이어졌다. 시구개정이 시행되기 전인 1910년까지 이루어진 도로공사를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3] 성벽 훼철 후 서울 시가 도로 공사 (1907∼1910년)
공사 기간 공사 구간 延長 路幅 공사비용
1907년 9월 15일∼ 1908년 10월 30일
남대문 도로 개착
­
각 8칸씩 (약 14.5m) 137,776원 88전
∼1909년 5월 30일
남대문 도로 개착 부속공사
­ ­
남대문 ­ 남대문 정차장 도로 개수
240칸 (약 436.3m)
19칸 (약 34.5m) (보도 양측 2.75칸, 차도 13.5칸)
銅峴 도로 개수
464칸 (약 843.6m)
∼1910년
12칸 (약 21.8m) (보도 양측 1.5칸씩, 차도 ­ 9칸)
壽町­日出町
180칸 (약 327.2m)
5칸 (약 9.1m)
광희문­왕십리 도로 개수
454,604원 (부분개수 공사 포함)
도로 개수
593칸 (약 1078.1m)
유효폭원 4칸 (약 7.3m)
동대문 도로 개착
­ ­ ­
161) 박찬승, 2002, 러일전쟁 이후 서울의 일본인 거류지 확장 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제 5권 제2호, 131쪽.
- 29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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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7. 00:00 이런저런이야기
전주와 군산을 잇는 전군도로(全群道路)의 개수공사를 시작했다. 전주 근교에서 서문 까지 이루어진 도로공사에 따라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읍성의 서쪽 성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후 전주 시가지 서쪽에 반원형의 도로가 개설되었다. 142) 이어서 전주 남문의 좌우 성벽은 통행의 불편을 이유로 훼철되었고, 이후 도로가 개설되었다. 143)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북부 지방의 성곽이 훼철되기 시작했 다. 이후 대구에서는 거류민단이 성곽 훼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서울에서는 통감부 설치 이후 성벽 훼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다가,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의 구성으로 도성의 일부분이 처음으로 허물어졌다. 이후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각 지역의 성곽 훼철이 결정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인 지방관리의 요청에 의해 성곽의 훼철이 진행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새로운 도로의 개설을 위해서 성곽의 외벽인 성벽이 주로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관찰부 소재지 13곳 가운데 서울, 충주, 전주, 광주, 대구, 진주, 평양, 함흥 총 8곳의 성곽이 훼철되었다. 성곽의 훼철은 일본인 거류민이 진출해 있는 도시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 시기 성벽이 훼철된 지역 가운데 일본인 거류민이 적은 곳은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훼철된 동림진과 남원 두 곳이 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인 거류민이 조선시대부터 활성화된 전통적인 성곽도시가 형성된 곳에 침투하는 과정에서 기존 도시의 장벽을 허문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병합 이후 총독부는 1912년 10월 7일 시구개정의 지침을 시달했다. 이후 각 도시의 시가도로가 개수되면서 읍성의 훼철이 계속되었다. 시구개정으로 인한 시가지 개조는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朝鮮市街地計劃令) 이 공포될 때까지 22년간 지속 되었다. 한국병합 후 총독부가 시가지를 개조하며 훼철한 성곽은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서울에서는 광희문 부근 성벽(1912), 남소문터 부근 성벽(1913), 남대문­소 의문 구간 성벽, 소의문(1914), 돈의문(1915)이 훼철되었다. 144) 또한 전주읍성의 동반부 (1910) 145) , 청주읍성(1911∼1912) 146) , 경주읍성의 남문(1912) 147) , 광양읍성의 일부분 (1913) 148) 등이 훼철되었다. 이후 평양성의 서쪽 성벽(1914∼1916) 149) , 나주읍성(1910
∼1920) 150) , 길주읍성의 동문(1918)이 허물어졌다. 제주도에서는 1910년대에 읍성의 대
142) 全州府, 1943,全州府史, 666쪽; 福島士郞, 1909,李朝と全州, 113∼115쪽.
143) 全州開路 ,皇城新聞, 1909년 9월 12일.
144) 서울역사박물관, 2015,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54∼57쪽.
145) 朝鮮總督府, 1930,朝鮮土木事業誌, 1050쪽;全州府史, 691쪽.
146) 박상일, 2013, 청주읍성의 파훼와 성돌의 분산 ,충북문화재연구제8호, 50쪽.
147) 김신재, 2009, 1910년대 경주의 도시변화와 문화유적 ,신라문화제33집, 93쪽.
148) 우승완·남호현, 앞의 논문, 226∼227쪽.
149) 김민아·정인하, 앞의 논문, 221쪽.
150) 전근완, 앞의 논문,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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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6. 00:30 이런저런이야기

제3장 성벽 훼철 이후의 상황
제1절 신작로 건설 : 서울, 평양, 대구, 전주의 사례
통감부가 설치된 후 이토통감은 시정개혁의 일환으로 도로개설을 시작했다. 157) 통감 부는 1906년 3월 기업자금채의 일부를 나눠서 주요 도로를 수리하였다. 그리고 진남 포-평양-원산 간, 광주-목포 간, 대구-경주-영일만 간, 전주-군산 간의 4개선의 개설을 위하여 149만 6,000원의 보조금을 책정하였다. 같은 해 8월부터 설계에 착수하여 1907년 5월 4개선을 동시에 기공하여 같은 해 말까지 공사를 마쳤다. 158) 이와 같은 신작로 159) 의 개설은 한국병합 후에도 계속되었다.
본장에서는 성벽이 훼철된 후 생긴 도로망의 변화나 도시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시구개정사업이 일어나기 전인 1912년까지 도로가 공사된 상황을 살펴보 겠다. 160)
157) 1906년 4월 20일 국장 1인, 사무관 2인, 기사 2인의 치도국을 내부에 임시로 설치하고, 평양·대구·목포·군산 등에 치도공사소를 두어 도로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1906년 6월 치도국을 토목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08년에는 토목과·조사과·서무과·위생공사과의 4과를 설치하는 등 도로 건설을 위한 조직의 개편도 이루어졌다(조병로, 2009, 일제 식민지시기의 도로교통에 대한 연구(Ⅰ)-제1기 治道事業(1905∼1917)을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 연구제59호, 11쪽).
158) [주석 표 4] 1906년 시행 도로공사 현황
구간 거리 준공거리 대구­영일만 93,277m 16,754m 군산­전주 68,299m 19,774m 진남포­평양 53,000m 6,000m 목포­광주 86,920m 20,800m
출처 : 京城府, 1934,京城府史(3), 朝鮮印刷株式會社, 299∼300쪽.
159) 신작로라는 용어는 서울시내의 전차가 다니는 도로 신설이라는 의미로 1901년 1월 9일자 제국신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 이후 신설도로, 혹은 기존도로와 같은 노선이더라도 근대적 차량의 통과를 전제로 한 고규격 도로를 가리키는 말로서 민간 인쇄물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도도로키는 그의 논문에서 신작로를 일제가 건설한 ‘高規格 도로’라고 정의하였다(도 도로키 히로시(轟博志), 2004, 20世紀前半 韓半島 道路交通體系 變化 ­ “新作路” 建設過程을 中心으로 ,지리학논총별호54, 4∼5쪽).
160) 총독부는 1912년 10월 7일 훈령 9호를 통해 시가지를 상대로 하는 시구개정에 대해 시달 했다. 그 후 1913년 2월 25일자 총독부령 제11호로 市街地建築取締規則 을 경찰법령의 하나로 발포하게 된다. 1913년부터 시구개정사업을 실시한 도시는 서울, 대구, 부산, 평양, 진남포, 신의주, 전주, 진해, 진주, 해주, 겸이포, 함흥이었다.
- 28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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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5. 00:00 이런저런이야기

성벽이 허물어져 통행에 방해가 되고 위험하니, 성벽을 훼철해서 5칸(약 9.1m) 너비의 도로를 만들고 좌우의 민호는 모두 상점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이었다. 103) 내부에서는 이에 대해 무너진 성곽을 중수할 상황이 안 되면 그때 성곽과 성문을 훼철할 것이므 로, 현 상황에서는 허물지 말라고 전했다. 또한 후에 훼철 후 자재의 사용 방침이 확정되면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104) 그러나 이 지시를 받았을 때는 이미 성벽의 절반 이상이 헐리고 난 뒤였다.
내부에서는 성벽을 제멋대로 훼철한 박중양을 엄하게 훈계하였고, 105) 그해 11월 조정은 허가 없이 성벽을 허문 박중양을 해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통역을 담당한 이토통감과의 친분으로 인해 큰 징계를 받지 않았다. 106) 이토 히로부미는 사적인 친분으로 박중양을 감싸줬으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곽 훼철에 대한 통감부의 방침으로 생각된다. 한 달 후에 일본 거류민단장은 박중양의 허락으로 동, 서쪽의 관청을 훼철하고 선화당(宣化堂) 앞에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107)
대구읍성은 외부가 석재로 축조되었고 내부는 흙을 쌓은 구조였는데, 일본인들은 필요한 석재만 가져가고 흙은 방치하였다. 일본인들은 석재를 무료로 가져가는 대신그 안에 쌓인 흙을 처리하기로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장마철에 흘러내릴 토사물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호소가 이어졌다. 108)
다음해 3월 박중양은 성벽을 훼철한 후 도로를 개설할 것이며 흙으로 만든 토벽을
없애겠다는 내용의 성벽해체보고서를 올렸다. 109) 내부에서는 인민에게 방해가 되지 않
이 岩瀨靜, 中江五郞平, 伊藤元太郞, 齊藤芳造 등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岩瀨靜은 성벽 훼철 과정에서 나온 토사를 이용하여 북문 방면의 저습지인 도원동을 매립하고 유곽을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3쪽;大邱物語, 161∼162쪽).
103)慶尙南北道來去案제2책, 奎17980(경상북도관찰사서리 대구 군수 박중양→수신자 누락);
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2쪽.
“報告書 大邱府 城堞이 年久하야 土石이 處處崩壞에 但有妨於行路일  더 러 實是危險하온 此城堞을 撤去할진 乃成廣可為五間道路하고 左右에 民戶난 由是而自然市肆를 作하겟삽기에 大邱市廳으로 主管케하야 此事業을 實行케하고저 茲에 報告 오니 査照處分하심을 伏望 광무 10년 10월 慶尙北道觀察使署理 大邱郡守 朴重陽.”
104) 部不可認 ,帝國新聞, 1906년 10월 31일.
105) 達察論警 ,皇城新聞, 1906년 11월 19일.
106) 박중양은 특히 이토의 집인 滄浪閣에서 통역을 맡아 이토의 신임을 얻었다. 박중양은 이토에게 인정받아 기용된 이후로 이토를 신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大邱物語, 138∼139, 168쪽).
107) 逵察請裁 ,帝國新聞, 1906년 12월 12일; 達察報告 ,皇城新聞, 1906년 12월 12일.
108) 城廢民怨 ,帝國新聞, 1906년 12월 1일; 朴倅滑手 ,皇城新聞, 1906년 12월 1일.
109)慶尙南北道來去案제2책, 奎 17980(대구 군수 박중양→외부대신);大邱府史, 제1 연혁편 203∼204쪽.
“城壁撤去事 內部指令内開 城壁基址樓門을 請與外人은 是何擧措인지 甚不妥當하니 決不可認
許이고 從他方針을 硏究하야 道路을 開拓하야 人民에 便宜와 道郡에 公共利用할 計劃을 該道
觀察使에게 報明하야 自道로 轉報本部케할 事이시온바 各門과 望樓를 從長利用하며 城堞基址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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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4. 19:35 이런저런이야기
통감부가 도성의 성벽을 허문 것은 교통 혼잡을 해결하고 근대적인 도로를 개설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지만, 동시에 성곽 파괴를 통해 왕성의 권위를 박탈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메이지정부가 막부의 상징이었던 성곽을 파괴하며 구 권력이 새로운 정부체제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도성을 파괴함으로써 한국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129)
[그림 1] 좌우 성벽 훼철 전의 남대문(1895년 촬영) [그림 2] 좌우 성벽 훼철 후의 남대문(1910년 촬영) 출처 :京城府史출처 :京城府史
[그림 1]에서 남대문 양쪽에 성벽과 민가들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남대문의 좌우 성벽이 훼철된 [그림 2]를 보면 민가들이 정리된 것과 전차가 더 이상 남대문의 홍예 안을 통과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908년 2월 18일에 열린 제31회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법부대신 조중응이 하수개수를 위해서 청계천 하구인 동대문 부근의 성벽을 파괴할 것을 제의했 다. 130) 남대문의 남측 성벽은 3월 8일부터 훼철이 시작되었고, 131) 동대문의 북측 성벽과 남측 오간수문은 3월 11일부터 훼철되었다. 132) 이어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9월에
128)京城の面影, 212쪽.
129) 메이지정부는 막부의 성을 파괴하며 옛 권위가 새로운 정부체제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舊 藩領民에게 보여주었다. 특히 戊辰전쟁때 정부와 교전한 東北·北陸의 여러 藩이나 親幕府쪽
의 大名가 거주하는 성을 철저히 파괴했다. 이후에 江戸城 외곽의 성벽과 성문의 보존이 주장되었지만 그 이유는 宮城의 존엄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으로 보아 서울의 성곽의 파괴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6∼207쪽).
130) 김정명, 1967, 한국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31회 ,일한외교자료집성6中, 巖南堂書店, 539쪽(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05쪽에서 재인용).
131)京城府史(2), 292쪽; 毀城着手 ,皇城新聞, 1908년 3월 10일.
132) 先着東門 ,皇城新聞, 1908년 3월 8일; 毁城着手 ,大韓每日申報, 1908년 3월 12일( 경성부사(2)292쪽에서는 동대문 좌우성벽의 훼철이 3월 8일부터 이루어졌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1934년 간행된경성부사보다는 훼철 당시에 기사가 나온 두 신문에 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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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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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3. 00:30 이런저런이야기

제3절 통감부 : 서울의 사례
종로­남대문­원효로 4가의 전차궤도부설공사가 1900년 1월에 완공되어 남대문의 좁은 누문 안으로 전차가 다니게 되었다. 1905년 초부터는 경부철도까지 개통되어 많은 철도 승객이 남대문을 통해서 입성하였으므로 남대문 관문은 매우 혼잡하였다.
이에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는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헐고 성문을 우회하는 2개의 통로와 하나의 대로를 뚫어 통행을 편리하게 하자는 공문을 1905년 6월 27일에 보내 왔으나 116) , 한국정부는 거절하였다. 117)
그러나 1905년 11월에 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한국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내정 간섭이 심해졌다. 결국 1907년 3월 30일,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이 동대문·남대문 좌우성첩을 훼철하는 건 을 올려 고종에게 재가를 받았다. 마차와 사람이 동대문과 남대문의 중간을 관통하는 전차에 치이는 사고가 많으므로, 문루 좌우의 성벽을 각 8칸씩 훼철하여 전차의 출입선로로 삼게 하고 정문으로는 사람만 통행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118)
내부에서는 훼철할 남대문 좌우 성벽 8칸 부근의 가옥 가운데 외국인 가옥은 해당 이사청과 교섭해서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본국인 가옥은 시세에 따라 매수하라고
인 상권 지역이 대구의 중심상권으로 자리 잡았다).
116)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에 의해서 한국통감부가 개설되자 일본거류민회는 서울의 도시개조를 계획했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교통상 장애가 되는 남대문의 처리였다. 당시의 조선군사 령관 長谷川好道는 砲車의 왕래에도 지장이 생기니, 그런 낡아빠진 문은 파괴해 버리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인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中井喜太郎(中井錦
城와 동일인물)가 남대문 파괴에 반대하고 보존을 주장했다. 남대문은 加藤淸正가 임진왜란
때 빠져나간 문으로,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안으로 남대문 좌우 도로 확장안을 제시 하여 도면을 첨부해서 하야시공사에게 올렸다. 그 결과 서울 성안­남대문­남대문 정차장을 연결하는 간선도로가 남대문 좌우 도로를 확장한 형태로 이루어졌다(中井錦城, 1915,朝鮮回顧
錄, 糖業硏究會出版部, 167∼169쪽; 長野末喜, 1932,京城の面影, 內外事情社, 212쪽; 岡田
貢, 1936,京城史話, 日韓書房, 69∼70쪽; 오타 히데하루, 2003, 앞의 논문, 216∼217쪽에서 재인용). 오타는 이것이 결정된 때를 하세가와가 조선군사령관이었던 1904년 9월∼1908년 11 월과 나카이가 경성거류민단회장이었던 1903년 10월∼1905년 12월까지가 겹치는 1904년 9월 부터 1905년 12월 사이로 보고 있다. 일본공사 하야시가 갑자기 1905년 6월에 남대문 양쪽의 성벽을 훼철하자고 건의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117) 손정목, 1982, 앞의 책, 110∼111쪽.
118)官報, 1907년 4월 3일;議政府 起案제23책, 奎17746(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 決議上奏 ,皇城新聞, 1907년 4월 1일; 電路特開 ,皇城新 聞, 1907년 4월 3일.
1907년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의 성벽을 훼철하고 전차선로를 가설키로 결정되었다. 전차로를 복선화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단선일 경우는 성문 중앙으로 궤도가 설치되었지만 복선일 경우 성곽을 훼철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04,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 293쪽).
- 22 -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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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2017. 1. 22. 18:32 이런저런이야기

훼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85) 일본병참사령부는 한국정부의 허가 없이 도로 개축을 위해 평양성 부근 민가 58호도 없애려고 하였다. 86)
이후 사령부에서 대동문 서쪽부터 남문 성벽까지 허문 후에 도로를 만들었다고 평양 군수가 보고한 내용으로 보아, 대동문 성벽은 10월 초순에 훼철된 것으로 파악된 다. 87) 이어서 일본군은 대동문 밖 옹성을 파괴했다. 88) 이 때 대동문 성벽 쪽이 최초로 허물어 진 것은 일본인 시가지와 연결된 부분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07년 5
월 평양이사청은 주작문의 좌우 성벽도 훼철하였다. 89)
함흥성의 성곽 훼철은 1906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결정되었는데,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정부는 일본군이 성벽을 훼철하고 도로를 개설하려는 것에 대해 국경의 방어를 이유로 제지하였다. 90) 그러나 얼마 뒤인 4월 30일에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은 교통의 편의를 위해 함흥 성곽이 훼손되는 것은 불가피하니, 함흥 재류 일본인단체 및 원산 이사관이 청원하면 허가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보낸다. 그 사이 통감부에서 주재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경의 방어를 할 것이므로 문제없다는 내용을 정부에게 전달한 것이다. 통감부는 함흥성을 헌 후에 재류일본인들이 도로와 하수 구의 설치를 담당할 것이며, 이것을 통해 도시가 발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91) 이후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함경남도관찰사에게 일본인이 함흥 성벽을 훼철한 뒤 도로를 개설하는 것을 허가하라고 지시하였다. 92) 이어 일본 헌병은 구천각(九千閣)도 훼철 하였다. 93)
또한 일본 병참소는 1905년 10월 평안남도 안주에서 평안문과 소동문을 임의로 허물었고 94) , 1907년 7월에는 강계군 주재 일본 수비대가 강계읍성의 성벽을 훼철하였 다. 95) 이들 지역에서는 러일전쟁 이후 한반도 북쪽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다소 이른 시기인 1905년부터 1907년 사이에 훼철이 진행되었다. 96)
85)平壤報牒제2책, 奎17872­2(평양감리서리 평양감리서주사 김훈→외부대신 박제순); 毁城 作路 ,帝國新聞, 1905년 10월 3일.
86)平安南北道來去案제10책, 奎17988(평안남도관찰사서리 평양 군수 이승재→외부대신 박제 순).
87) 民難奠接 ,皇城新聞, 1905년 10월 11일.
88) 民情不忍 ,帝國新聞, 1905년 11월 14일.
89) 平察質稟 ,帝國新聞, 1907년 5월 4일.
90) 毀城不許 ,皇城新聞, 1906년 4월 20일.
91)內部來去案제1책, 奎17768(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이지용); 城壁毀撤 ,大 韓每日申報, 1906년 5월 8일.
92)內部來去案제1책, 奎17768(내부대신 이지용→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 不得不認 ,大 韓每日申報, 1906년 6월 14일; 毁城又認 ,帝國新聞, 1906년 6월 14일.
93) 亦一恠事 ,皇城新聞, 1906년 6월 28일.
94) 安州郡報 ,帝國新聞, 1905년 10월 30일.
95) 城堞毁撤의辨明 ,帝國新聞, 1907년 6월 22일; 虛實相蒙 ,皇城新聞, 1907년 6월 22일. 러일전쟁 이후(1905∼1910) 도성·읍성 성벽의 훼철  / 김혜미 이용률 보통
학위논문,한양대학교 대학원,석박사학위논문실(107호)
학위논문(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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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조현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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